2024.12.03 - 2024.1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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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주는 개발 기술 관련 글을 쓸 마음이 들지 않네요. 회사에서도 새로운 스쿼드로 협업과정의 어려움, 일이 되게 하는 것, 좋은 설계, 코드 리뷰에 관해 여러 고민들을 했지만 별로 쓰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는 한 주 입니다.

회사 동료들의 친절함과 소속감으로 인한 충만함으로 좋은 하루를 보내기도, 일하는 방식에 대한 고민을 옆팀 동료가 듣고 조언해준 고마운 날도, 처음 합을 맞춰보는 동료와의 커뮤니케이션 스트레스를 받는 날도, 사이드 퍼블리싱 프로젝트 릴리즈 작업 와중에 계엄령 소식을 듣고 불안해하며 집으로 들어가던 날도 있었습니다.

10년지기 친구들과 연말 파티를 위해 마음에 드는 붉은 색 미니드레스 구입을 고민한 2주가 무색하게 우리중 아무도 말하지 않았지만 모두 검정색 두꺼운 옷을 입고 장갑, 모자, 마스크, 핫팩을 들고 모였습니다. 딸기와 생크림을 어설프게 발라 만든 크리스마스 케이크 앞에서 평안한 2025년을 위해 기도하고, 서로의 근황을 물어보고, 친구들은 밤새 감기에 걸린 제 컨디션을 체크해주었습니다. 목이 붓고 열이 나도 그냥 집으로 가라고 하지 않는 친구들이 고마웠습니다. 말하지 않아도 아는 서로의 마음, 내가 바라는 것과 상대방이 하는 행동이 같지 않아도 기꺼이 들어주는 것. 이런게 일을 할 때나 친구들을 만날 때나 어렵지만 중요한 일 같습니다.

항생제를 먹고 누워 자다가 열이 떨어진 즈음 오랜만에 대학에 다닐 때 읽었던 사람, 장소, 환대를 꺼내 읽었습니다. 이 책은 매 챕터, 문단 어느 곳 하나 좋지 않은 곳이 없는데, 읽을 때마다 다 다른 생각이 드는 게 신기한 책입니다. 읽는 시기마다 지금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어떤건지, 필요로하는 건 뭔지 알게 해주는 느낌.

5장. 우정의 조건 p.200 - p.204

고래들의 공동체와 마찬가지로, 이 고대의 코즈모폴리스를 조직하는 원리는 열린 커뮤니케이션 - 누구나 제약없이 참여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 이다. 하지만 그것이 열려있는 방식은 사뭇 다르다. 고래들은 아무 매개 없이 동시성 속에서, 모두가 모두에게 직접 연결되어 있다. 동일한 소리의 장 안에 갇혀 있기에, 그들은 교신 대상을 선택할 수 없으며 침묵 속으로 물러날 수도 없다. 다른 말로 하면 그들은 서로에게 청각적으로 완전히 노출되어 있는데, 이는 언제나 상대방을 침범할 수 있고, 또 상대방에 의해 침범될 수 있음을 뜻한다. 반면 도서관의 도시 알렉산드리아에서 영혼들은 책을 매개로 서로에게 접근한다. 그들을 연결하는 것은 소통이 아니라 소통 가능성이다. 커뮤니케이션의 지평 전체를 감싸는 소리의 궁률이 아니라, 도처에서 조용히, 산발적으로 일어나는 교류들이다. 이 교류는 거리에서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과 혼자 책 속으로 침잠하는 것을 모두 포괄한다. 독서와 대화 사이에는 아무런 본질적인 차이가 없다. 독서는 또 다른 대화 - 비동시적으로 이루어지는 대화 - 이기 때문이다.

공동체에 대한 이 두 가지 상상은 서로 경합하면서 지성사 안에서 꾸준히 마찰을 일으켜 왔으며, 그 찌꺼기가 대중, 공중, 다중 같은 개념 안에 침전되어 있다. 유감스럽게도 오늘날 공동체에 대해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고래들의 소통 방식을 배타적으로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 공동체를 나타내는 전형적인 이미지는 강강수월래를 할 때처럼 모든 사람이 손에 손을 잡고 둥글게 둘러서 있는 것이다. 모두가 모두의 얼굴을 볼 수 있고, 모두를 향해 말할 수 있도록 말이다. 시선과 귀와 두 손을 온전히 타인에게 내어주는 이 '열린' 자세에 비해, 도서관에 웅크리고 앉아 이 책을 읽는 사람의 모습은 너무나 '개인주의적'이고 '폐쇄적'으로 보인다. 수그린 머리는 나의 관심사는 오직 책이라고 말하는 것 같고, 구부린 등은 그러니 부디 건드리지 말아달라고 말하는 것 같다. 책을 읽는 것은 자신을 눈앞에 보이는 세상보다 더 큰 세상과 연결하는 행위이다. 하지만 도서관의 적막함은 이 사실을 자꾸 잊게 만든다. 내가 대학에 다닐 때, 도서관에서 공부하는 학생들은 '밀실'에 숨어 있다고 여겨졌으며, '광장'으로 나오라는 부름을 받곤 했다.

(중략)

절대 공동체에 대한 환상은 이처럼 '개인이냐 공동체냐'라는 잘못된 양자택일을 강요한다. 공동체에 속한다는 것이 나와 다른 사람 사이의 벽을 없애는 것 - 문자 그대로 '하나가 되는 것' - 을 의미한다면, 공동체에 대한 옹호는 사생활 침해를 정당화한 구실로 쉽게 전락할 것이다. 하지만 개인과 공동체는 결코 대립적인 개념이 아니며, 공동체 정신을 추구하는 것과 사생활의 자유를 갖는 것 사이에는 본디 아무 모순도 없다. 개인에게 자리/장소를 마련해주고 그의 영토에 울타리를 둘러주는 것이 바로 공동체의 역할인 까닭이다. 뒤르켐이 지적했듯이, 공공성이 강화될수록 사생활의 자유는 오히려 커진다. 가부장제 하에서 기혼 여성과 미성년 자녀는 사생활의 자유를 갖지 못한다. 그들은 집안에서도 마음 편히 쉴 수 없고, 가부장의 눈치를 보면서 일종의 대기 상태에 있어야 한다. 물론 가부장의 성격이 어떠냐에 따라 그들이 느끼는 압박의 정도는 달라진다. 하지만 가부장이 언제든지 그들을 야단칠 수 있고 심지어 때릴 수 있다는 사실은 바뀌지 않는다(개인 공간에 대한 침범은 최종적으로 몸에 대한 침범으로 나타난다. 몸은 자아의 마지막 영토이자, 나머지 영토들 - "개개의 인간 존재를 둘러싼 가상의 구" - 에 대해 개인이 행사하는 주권의 원천이다). 그런데 가부장이 이런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것은 국가가 가정을 가부장의 사적 영토로 간주하고 그 안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 개입을 자제하기 때문이다. 다른 말로 하면, 가부장 상회의 약자들이 겪는 사생활 박탈은 그들이 공공의 힘이 미치지 않는 곳에 고립되어 있다는 사실과 관련된다. 좀더 일반적으로 말해서, 프라이버시의 결여 - '자기만의 방'이 없다는 것 - 와 공적 공간에서의 배제는 장소 상실placelessness의 두 형태로서, 동전의 양면처럼 맞붙어 있다. 사회 안에서 자리/장소가 없는 사람, 사회의 바깥에 있는 사람은 자신을 위해 나서줄 제삼자를 갖지 못했기에, 사적 관계 안에서도 자신의 자리/장소를 지킬 수 없다.

개인과 공동체, 사적인 것과 공적인 것의 관계를 이렇게 이해할 때, 비로소 우리는 절대적인 환대의 가능성에 대한 질문에 절충주의적 답변(절대적 환대는 불가능하지만 그 불가능성의 지평을 향해 나아가는 것은 가능하다 등등) 이상의 것을 제시할 수 있게 된다. 절대적 환대가 사적 공간의 무조건적이고 완전한 개방을 의미한다면, 우리는 데리다가 그랬듯이 최악의 상황을 머릿속에 그리면서 그러한 환대가 과연 가능한지 자문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절대적 환대가 타자의 영토에 유폐되어 자신의 존재를 부인당하는 사람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뻗치는 일, 그들을 인지하고 인정하는 일, 그들에게 '절대적으로' 자리를 주는 일, 즉 무차별적이고 무조건적으로 사회 안에 빼앗길 수 없는 자리/장소를 마련해주는 일이라면, 우리는 그러한 환대가 필요하며 또 가능하다고 말 할 수 있다. 그러한 환대는 실로 우정이나 사랑 같은 단어가 의미를 갖기 위한 조건이다.

(생략)

한강 작가의 12월7일 노벨문학상 '빛과 실' 강연도 붙여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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